달도 구름사이로 숨어든 이때 한 무리의 그림자들이 내성밖에 몸을 숨긴 채 와이어스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성문밖은 여느 때와 같이 조용했다. 문을 지키고 있는 4명의 병사들, 그리고 한쪽에는 12명의 병사들이 모여 몸을 녹이고 있었다.
"마커스! 상황은?"
"대장, 지금 보이는 인원들 외에도 성문위쪽과 안에 몸을 숨긴 병사들이 제법 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문 쪽은?"
"그래도 여기가 병사수가 가장 적습니다. 다만 이쪽에만 이질적인 기운이 조금 느껴집니다. 아마도 누군가 올 줄 알고 대비를 한 것 같은데, 오늘은 철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사막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수확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을 하는 와이어스.
"일단 마커스 자네와 로이만 남고 전부 철수 시키도록."
"네?"
마커스는 와이어스의 명령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할 수 없이 부하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잠시 후 어둠속에는 여섯 개의 눈이 번뜩이며 내성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들은 내가 신호를 주면 최대한 숨을 죽이고 각자 성문 좌측과 중앙으로 이동한 후 30을 세고 공격을 시작한다. 대신 성문이 열리고 안에서 병사들이 나오면 동시에 자리를 벗어나 흩어지도록. 그 다음은 알지?"
"네. 대장! 그런데 대장혼자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저희들도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와이어스.
"오늘은 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러니 혼자 움직이는 편이 좋다. 둘 다 준비해."
그 순간 달이 구름을 벗어나 내성문 밖을 비추었다. 모두들 갑작스런 상황으로 인해 몸을 바닥에 바짝 움츠렸다. 와이어스 일행은 그렇게 한참을 엎드리고 있었다.
다시 달이 구름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마커스와 로이의 눈에 들어 온 마커스의 수신호. 동시에 와이어스는 성문 우측으로, 그리고 로이는 성문 좌측으로 이동했다. 30초의 시간이 지나자 중앙에 위치해 있던 마커스는 등에 메고 있던 활을 꺼내어 두 대의 화살을 쏘았다. 문을 지키고 있던 네 명의 병사 중 둘이 가슴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이를 본 남은 두병사가 방패와 창을 앞으로 향한 채 호각을 불려는 순간 다시 마커스가 쏜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퍽! 윽!'
'철그렁!'
몸을 녹이고 있던 병사들은 뒤늦게 쓰러지는 병사의 갑옷 소리를 듣고 호각을 불며 여섯명의 병사들이 성문 앞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나머지 여섯명의 병사들은 방패를 가슴으로 모으고 화살이 쏘아진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순간 성문 위쪽에서 횃불이 켜지면서 활을 든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예상대로 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윽고 성문이 열리고 많은 수의 병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순간 마커스는 화살 없이 빈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파이어 에로우!"
'슉... 슉... 슉... 슉.... '
'펑..... 평..... 평...... 펑.....'
마커스가 당긴 빈 활시위는 불꽃을 담은 듯 병사들에게 쏘아져 나간 뒤 폭발하였다. 이때 좌측으로 간 로이는 작은 지팡이를 꺼내 들고 내성 문 위쪽으로 향해 불꽃을 쏘았다.
"익스플로젼!"
'슈우욱.............번쩍!'
강렬한 불빛으로 인해 성문 밖으로 나오던 병사들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우왕좌왕 하는 순간 로이는 병사들 틈에서 늑대의 형상을 한 무리들을 볼 수 있었다. 병사들보다 머리 세 개를 더 얹은 큰 키에 검은색 투구와 갑옷을 입고 양손에는 철퇴를 거머쥐고 있었다.
한편 와이어스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소리 없이 몸을 날려 우측 성벽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내성문 밖에서 사라진 마커스와 로이.
내성문밖은 죽거나 다친 병사들과 두 눈을 손으로 가린 채 아우성대는 병사들로 인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리고 내성문밖은 하나둘 켜지는 주택들의 불빛으로 인해 점점 대낮처럼 밝아지고 있었다.
"요란하게도 시작하는군. 그렇다면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클락의 말에 클라리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창문을 통해 점점 밝아오고 있는 내성 문쪽을 바라보았다.
'척! 척!'
잠시 후 클락과 클라리스는 안뜰로 내려앉는 두 개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마커스와 로이였다. 상점 안으로 들어온 마커스와 로이는 바로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클라리스는 곧장 안뜰로 나가 작은 주머니에서 한주먹의 모래를 꺼내 흩뿌렸다.
"대지의 정령이여! 그대의 숨결로 이들이 걸어온 길을 숨겨주세요."
흩뿌려지는 모래는 순간 하얗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언뜻 소녀의 미소 짓는 모습이 보였다. 이내 사라진 빛은 모래먼지로 변해 뒤뜰에서 지붕위로 그리고 마커스와 로이가 지나온 길을 따라 사라졌다.
숨을 고른 마커스와 로이를 보던 클락은 로이를 향해 말했다.
"와이어스와 마커스만 온 것이 아니었나?"
"저와 다른 사람들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 와이어스와 다른 사람들은?"
순간 클락과 마커스, 로이는 클라리스의 표정을 살피고 '아차' 싶었다.
마커스는 로이의 말을 이어 상황 설명을 했다.
"그럼 와이어스는 잠입에 성공했다는 말인데, 걱정 안 해도 되겠지?"
클라리스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클락.
"대장이 어떤 사람인데요? 늑대인간이 떼로 몰려와도 상대가 안될텐데. 헤헤헤!"
그렇지만 이미 클라리스의 걱정을 덜어주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내성 안으로 무사히 잠입에 성공한 와이어스는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한 내성 밖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날려 내성 안쪽을 향해 내 달렸다. 순간 와이어스는 몸을 멈추고 움츠렸다. 이미 많은 병사들로 가득한 내성 안에서 죄수를 가두는 감옥과 지난번에 침투하려다 실패한 황실 지하 창고 중 어디로 갈지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 감옥으로 가기에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와이어스는 황실 지하창고 쪽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어둠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림자 하나가 어둠을 방패삼아 황제의 집무실 쪽으로 스멀스멀 기어갔다. 집무실 앞에는 누가 보아도 일반병사가 아닌 고급기사 4명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문을 지키고 있었다.
집무실 앞쪽에 있는 커다란 기둥 뒤에 그림자가 되어있는 와이어스. 순간 보일 듯 말 듯 투명한 연기가 기사들에게 뻗어 나갔다. 기사들은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대응하려는 순간 이미 몸이 마비되어 눈 뜬 장님이 되어버렸다. 그림자는 이들을 지나쳐 집무실 문 아래쪽으로 스며들었다.
집무실에 들어선 와이어스는 황제의 의자로 다가가 의자의 오른쪽 팔걸이의 밑 부분을 지긋이 눌렀다. 그러자 의자의 뒤편 바닥에 사람이 들어 갈만한 입구가 생기며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와이어스는 몸을 날려 빛이 없는 계단 아래로 쏘아져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간 와이어스는 순간 온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기운에 몸이 떨린 것이었다. 소리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이동한 와이어스는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책을 읽는 소리 같기도 하고 주문을 외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순간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를 들었다. 흡사 지옥에서 나는 소리와 같은...
이전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렇게 길지도 않았으며,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벽밖에 없었다. 와이어스는 숨을 가다듬고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밀려오던 기운과 소리들.
결국 갈피를 잡지 못한 와이어스는 장갑을 벗고 손을 벽에 댄 채 조용히 속삭였다.
"바람의 정령이여 지금 들리는 소리로 나를 이끄소서."
순간 한얀 실과 같은 것이 벽을 타고 쭉 나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실과 같은 것은 한쪽 벽에 문 형태의 모양을 나타내고 이내 사라졌다. 다가선 와이어스는 오감을 최대한 집중해 벽에 귀를 가져다 댔다.
"흥얼 흥얼 흥얼 흥얼 흥얼 흥얼 흥얼."
와이어스는 좀 전에 들었던 알 수 없는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을 볼 수 없으니 갑갑하기만 할 뿐이었다.
'안을 볼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저벅! 저벅! 킁킁! 저벅! 저벅! 킁킁킁!'
이 때 빛도 없는 어둠속에서 누군가 킁킁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었다. 노린내와 썩은 고기 냄새가 진동을 했다. 와이어스는 다시 한번 어둠과 동화화기 시작했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대상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계속해서 킁킁거렸다.
이때 소리가 들려왔던 벽쪽에 문의 형태가 나타내며 열렸다.
"이놈의 킁킁거리는 소리 때문에 집중을 할 수가 없잖아. 쓸모없는 똥개XX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어둠속에서 안을 지켜 본 와이어스. 그만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가 본 것은 많은 수의 사람들이 벌거벗겨져 기둥에 묶인 채 죽어가고 있거나 죽어있는 모습이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 하지만 전체적인 외형에서 볼 때 완벽한 사람의 모습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마물과 같은 얼굴,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 눈이 없는 얼굴, 입이 없는 얼굴 등. 그리고 몸도 사람인지 동물인지 본적도 없는 모습을 한 형태였다. 그리고 눈을 굴려 더 둘러보았을 때 그만 헉하는 바람 빠지는 작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내성 안으로 침투시킨 사람들 중 청랑족 출신의 부하를 본 것이었다. 눈은 이미 한쪽이 빠져 나갔고, 혀는 길게 늘어졌으며, 팔과 다리는 없었다.
그때였다. 와이어스는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한줄기 검은 빛과 같은 섬광을 느꼈다. 어둠과 동화되어 있던 와이어스는 빠른 속도로 처음 들어왔던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퍽!'
'손에 느낌이 있는 걸 보니 아까부터 느낀 이상한 기운이 저 녀석인가 보군. 저런 녀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는데,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이곳을 찾아오다니. 잡으면 뭔가 얻을 수 있는 게 있을 텐데. 앞으로는 곳곳에 마법진을 설치 해 놓아야겠군. 키키키!'
생각을 하던 쿠로는 자신을 보고 멍해 있는 마물을 향해 욕을 하기 시작했다.
"이 쓸모없는 똥개XX들!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 어서 잡아오지 않고 뭐해?"
쿠로는 자신이 만든 마물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퍽! 깨갱!'
마물은 화풀이 상대를 찾듯 빠른 동작으로 와이어스를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입구에 도착한 와이어스는 그때서야 자신의 왼쪽 어깨가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더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마물이 어느새 자신의 등 뒤까지 따라왔다는 것이다. 집무실 위로 올라온 와이어스는 몸을 돌려 마물을 향해 등에 찬 검을 빼어 휘둘렀다.
'스르릉 ~~~ 쨍!'
강한 충격과 함께 뒤로 튕겨져 나간 와이어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물의 목을 향해 휘두른 검이 수갑으로 팔을 감싼 마물의 두 팔에 부딪쳐 튕겨져 나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상대해온 일반적인 마물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전에 보았던 마물인 늑대인간과 달리, 갑옷을 입은 걸로 보아 지능도 있어 보였고, 파괴력도 강한 또 다른 마물, 즉 마수병이었던 것이다. 늑대인간인줄 알고 제압한 후 벗어나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다시 어둠과 동화되어 문 밑을 빠져 나왔다. 문 밖은 아직도 마비가 풀리지 않은 네 명의 기사들은 두 눈만을 뜬 채 서 있었다.
'쾅! 우직끈!'
마수병은 문을 그대로 부수며 뛰어 나왔다. 그리고 그 파편에 휘말린 기사들은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마수병을 피하며 와이어스는 내성문 밖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둠과 동화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깨에 맞은 마법으로 인해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는 와이어스. 성문 밖에서 일어난 소동으로 인해 병사들의 시선이 밖을 향해 있는 지금 오로지 빠른 속도로 벗어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단, 마수병이 자신을 따라잡지 않는 한 말이다. 와이어스는 건물 밖을 벗어나려는 순간 들릴 듯 말 듯 울리는 작은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자신을 향해 쏘아오던 마수병이 걸음을 멈추고 큰 소리를 지른 후 다시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10여분 후 와이어스는 왕궁 안을 벗어나 내성문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통증을 참으며 바라본 어깨는 검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척! 털썩!'
무엇인가 안뜰로 내려서며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클락과 클라리스, 로이가 동시에 뛰어나왔다. 지붕위에서 밖을 보고 있던 마커스가 휘청거리며 골목으로 들어오는 와이어스를 발견하고 뛰어가 부축해서 안뜰로 데려온 것이다.
안뜰로 들어서자마자 쓰러져버리는 와이어스.
"마커스, 이게 무슨 일인가?"
"제가 밖을 보고 있었는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클락은 와이어스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클라리스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한 번 모래주머니에서 한주먹의 모래를 흩뿌렸다.